여든넷, 엄마는 공주가 되었다 > 자유게시판

본문 바로가기

자유게시판

여든넷, 엄마는 공주가 되었다

본문

엄마 손은 늘 젖어 있었다.


새벽에는 식구들과 공장 형들의 밥을 짓느라 물에 젖었다. 낮에는 가방공장의 본드와 고무풀이 손가락에 들러붙었다. 밤에는 미싱 기름이 손에 배었다. 손끝은 갈라졌고 손바닥은 굳은살로 딱딱했다. 겨울이면 갈라진 손가락에 반창고를 감고 다시 미싱을 돌렸다. 드르륵, 드르륵. 어린 나는 그 소리를 자장가 삼아 잠들었다.


엄마가 웃으며 말한 적이 있다.


"내가 처녀 적에는 말이다. 시집가면 손에 물 한 방울 안 묻히고 공주처럼 살 줄 알았다."


공주는 오지 않았다. 가난이 왔다. 아버지의 폭력이 왔다. 자식들이 왔다. 끝이 없는 일거리가 왔다. 엄마는 그것들을 모두 두 손으로 받아냈다.


몸이 기억하는 노동


엄마는 일흔일곱 살까지 병원 린넨실에서 수선을 했다. 엄마에게 정년은 없었다. 일을 그만둔 날은 회사가 정한 날이 아니라 몸이 정한 날이었다.


그리고 치매가 왔다.


더는 일을 할 수 없게 된 뒤에도 엄마의 몸은 일을 멈추지 못했다. 밤이면 빈 허공에 풀칠을 했다. 두 손으로 천을 펴고, 발로 보이지 않는 미싱 페달을 밟았다. 기억은 하나둘 빠져나갔지만, 몸에 남은 것은 평생 해온 노동이었다.


나는 시설만은 피하고 싶었다. 엄마를 집에서 모시면서 지역사회 통합돌봄을 받으면 된다고 생각했다. 살던 동네에서, 살던 집에서, 익숙한 골목을 바라보며 늙어가는 것. 나는 그것이 좋은 노년이라고 믿었다. 노인도 시설이 아니라 지역에서 살아야 한다고, 남의 어머니들 앞에서 늘 그렇게 말해온 사람이 나였다.


통합돌봄이 시작됐다. 화장실에 안전바를 신청했다. 설치되기까지 두 달이 걸렸다. 그 두 달 동안 엄마는 세면대 모서리를 붙잡고 일어섰다. 행정의 두 달은 서류 몇 장이 오가는 시간이다. 치매를 앓는 노인에게 두 달은 수십 번 넘어질 수 있는 시간이다.


한 지붕 아래에서 식구들의 목소리가 조금씩 높아졌다. 엄마를 가까이, 따로 모시는 것이 모두를 지키는 길이라 생각했다. 임시로 엄마가 머물 집을 지원 받을 수 있는지 물었다. 그런 서비스는 아예 없었다.


서류 위의 돌봄은 촘촘했다. 우리 집 현관 앞의 돌봄은 헐거웠다. 돌봄은 다시 가족의 손으로 돌아왔다. 그 손들도 조금씩 지쳐갔다. '살던 곳에서 늙어간다'는 말은 아름답다. 그러나 그 말에는 조건이 숨어 있다. 집이 버텨줄 때, 가족이 버텨줄 때. 둘 중 하나가 무너지면 그 문장도 함께 무너진다.


나는 집에 안 가니


원본보기

▲ 면회를 갈 때마다 엄마는 내 손을 붙잡고 물었다.

ⓒ hunth on Unsplash


나는 엄마를 시설에 모셨다. 입소하던 날, 엄마는 창밖을 바라보며 말없이 손을 쥐었다 폈다 했다. 나는 그 손을 차마 잡지 못했다. 면회를 갈 때마다 엄마는 내 손을 붙잡고 물었다.


"나는 집에 안 가니?"

"나는 언제 가니?"


집에서 모시지 못한 자식의 변명은 번번이 목에서 걸렸다. 돌아오는 길, 지하철 창에 비친 내 얼굴이 낯설었다. 평생 복지를 말해온 사람이 제 어머니 하나 집에서 돌보지 못했다. 면회는 매번 나를 무너뜨렸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엄마가 말했다.


"내가 젊어서 공주처럼 살고 싶다고 했잖니."


나는 엄마를 바라봤다.


"그 꿈을 여기 와서 이뤘다."


엄마는 손가락을 하나씩 펴 보이며 말했다.


"여기서는 밥도 차려주지. 빨래도 해주지. 목욕도 시켜주지."


엄마가 자기 손을 내려다봤다.


"내가 손에 물 묻힐 일이 없다."


소녀처럼 웃은 엄마.


어디서가 아니라, 누구의 손이


나는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시설은 실패이고 차선이라고 믿어왔다. 그런데 엄마에게 그곳은 평생 처음으로 남의 손에 기대도 되는 곳이었다.


이 이야기가 '결국 시설이 답'으로 읽히지 않기를 바란다. 엄마가 웃은 것은 그곳이 시설이어서가 아니다. 평생 남을 먹이고 입히고 씻기던 손이, 처음으로 돌봄을 받았기 때문이다.


우리 어머니 세대는 가정에서, 공장에서, 병원 뒷방에서 돌봄과 노동을 떠받쳐 왔다. 대부분 이름 없이, 제대로 된 값도 받지 못한 채였다. 그들이 늙어 돌봄을 받는 것은 짐이 되는 일이 아니다. 평생 내어준 것을 사회가 돌려주는 일이다.


그렇다면 물어야 할 것은 '집이냐 시설이냐'가 아니다. 안전바가 두 달이 아니라 두 주 만에 설치될 수 있었다면, 가족이 한계에 닿았을 때 잠시 머물 집이 있었다면, 엄마는 살던 집에서도 공주가 될 수 있었을까. 시설은 '집에 있지 못한 노인이 가는 곳'이 아니라, 존엄하게 돌봄 받는 또 하나의 집이 될 수 있을까.


통합돌봄은 이제 법이 되었다. 제도의 성패는 서류가 아니라 한 노인의 현관 앞에서, 세면대 모서리를 붙잡은 손끝에서 판가름 난다.


요즘 면회를 가면 나는 엄마 손을 잡는다. 입소하던 날 차마 잡지 못했던 그 손이다. 손은 말라 있다. 갈라졌던 손끝이 조금 부드러워졌다. 여든넷에 엄마는 공주가 되었다. 손에 물 한 방울 묻히지 않고. 복지국가란 어쩌면 이런 것인지도 모른다. 평생 젖어 있던 손을, 누군가 한 번은 말려주는 것.

0
로그인 후 추천하실 수 있습니다.

댓글목록1

함마렌치님의 댓글

profile_image
음...예...
네

커뮤니티 인기게시물

전체 118,701 건 - 1 페이지
슬생닷컴 회원들이 모여 자유롭게 이야기를 나누는 커뮤니티 메인 라운지입니다. 카지노와 슬롯, 스포츠 이야기부터 일상적인 잡담, 사이트 이용 중 떠오르는 생각이나 회원들 간의 소소한 대화까지 특정 주제에 얽매이지 않고 다양한 글이 오갑니다. 게임이나 베팅에 관심 있는 회원들이 모인 공간인 만큼 관련 대화가 자연스럽게 오가지만, 그 외에도 폭넓은 주제로 소통할 수 있는 자유로운 분위기의 게시판입니다.
번호
제목
글쓴이
게시판 전체검색